흔히 우리는 미래가 “온다”고 말한다. 마치 미래라는 어떤 실재가 있어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처럼 생각한다. 이는 일종의 착시현상이다. 이미 1,500년전 어거스틴은 과거는 기억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마음에 저장된 것이요, 미래는 기대와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것이고, 현재는 그것을 지목하는 순간 과거가 되어버리는 짧은 순간임을 통찰했다. 미래는 다가오는 어떤 실재가 아니다. 그것은 과거와 현재를 바탕으로 구성된 어떤 전망이다. 코로나 상황이 점차로 안정되고 있다. 뉴노멀을 준비해야 한다고들 한다. 그런데 우리가 전망하는 미래는 (그것이 오는 것이 아니라면) 대체 어떻게 시작되는걸까?

성경의 여러 굵직한 책들 가운데 마치 부록처럼 끼어 있는 룻기라는 책이 있다. 이 책은 기근을 피해 모압 땅으로 건너 갔다가 남편과 아들 둘을 여의고, 모압 며느리 룻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온 나오미의 이야기이다. 나이도 많고 의지할 남편도 없이 돌아온 나오미에게는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그 이름의 뜻은 기쁨인데, 나오미는 이제 자신을 “마라”로 불러달라 한다. 마라는 “쓰다”는 뜻이다. 자신의 인생이 슬픔과 괴로움 뿐이라는 탄식이다.

그런데 룻기의 이야기를 알고 있는 독자들에게는 나오미 집안의 미래가 보인다. 재난과 어려움으로 감추어져 있지만, 미래는 이미 나오미의 삶에 시작된 현실이다. 룻이 나오미를 떠나지 않겠다며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라할 때, 가난하고 소망없는 나오미를 부양하기 위해 낯선 곳에서 일하러 나갈 때, 그리고 우연히도 그의 장래의 남편이 될 보아스의 밭에 이르렀을 때, 독자들은 하나님이 이 가정에 주실 미래가 이미 와있음을 본다.

https://en.wikipedia.org/wiki/Book_of_Ruth#/media/File:1795-William-Blake-Naomi-entreating-Ruth-Orpah.jpg

독자의 눈에 보이는 이 미래를 룻기의 등장인물들은 보지 못한다. 룻와 보아스는 다만 그들이 당면한 상황 가운데 믿음으로 현재를 살고 결정하며 마음을 정하고 있을 뿐이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이 모든 일을 통해 메시아의 족보를 이루고 계심을 보지 못한다. 룻은 그가 나오미의 가정에 시집와서 만난 하나님께 신실하고자, 소망없는 시어머니를 부양하기로 결심한다. 자신이 어머니를 떠나면 하나님께서 벌을 내리셔도 마땅하다고 말한다. 룻의 결정은 분명 그의 믿음에서 온 것이다. 보아스는 나오미의 기업무를 자로 의무를 감당하겠다고 나선다. 그보다 더 가까운 친족이 경제적인 손해를 감당할 수 없다며 물러선 상황에서 그의 결정은 아름답다. 보아스 역시 하나님께 신실하고자 손해를 떠 안으면서까지 친족이 살아남도록 도우려한다. 룻과 보아스 두 사람 모두 자신들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알지 못하는 불확실성 가운데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살고자 한걸음씩 내딛고 있다.

그런데 바로 그 믿음의 결정과 순종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이 이루어진다. 미래는 그들의 믿음의 걸음을 통해 나오미 가정에 시작된다. 그리고 룻과 보아스 사이에서 난 아이는 다윗왕의 조상이 되고, 또 오랜 세월 후에 그 가문에서 메시아이신 예수께서 나신다. 하마트면 끊어질 뻔한 나오미의 가문이 이방인인 룻과 이방인의 아들인 보아스 (그는 여리고의 생존자 라합의 아들이다!)를 통해 이어지고, 그들의 후손을 통해 세상의 구원자이신 예수께서 오신다. 당대의 누구도 이 위대한 미래를 보지 못하였고, 전망조차 하지 못하였으나, 구원과 미래는 룻과 보아스의 믿음을 통해 시작된다.

https://en.wikipedia.org/wiki/Book_of_Ruth#/media/File:Julius_Schnorr_von_Carolsfeld-_Ruth_im_Feld_des_Boaz.jpg

지난 두 해 동안 많은 교회들이 마치 재난을 당한 나오미처럼 어려움을 겪고 희망을 잃어버렸다. 상황이 조금씩 나아지는 지금, 미래가 어떻게 올지 묻는 우리의 마음에 기대와 불안이 교차한다. 이제는 좀 나아지겠지 하는 기대가 있는가 하면, 뉴노멀이 어쩌면 더 큰 도전이라는 우려도 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온라인 예배와 모임을 하나의 옵션으로 생각하고 있고, 그러면서 전통적인 목회의 방식에 상당한 변화와 어려움이 찾아올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젊은 세대의 “이탈”은 이미 예견된 일이기도 하였거니와 이제는 그것을 이미 뉴노멀로 겪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물론 여러가지 현실적인 대응방안을 마련하는 것은 중요한 과제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잠시 한 발자국 떨어져서 룻기의 렌즈를 통해 오늘의 도전을 보고, 미래는 어떻게 시작되는지를 성찰하자. 미래와 희망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지만 (렘29:11), 연약한 우리의 시야에 그것은 언뜻 포착되지 않는다. 어려움 중에는 더욱 그러하다. 룻기는 우리에게 그 미래와 희망을 “보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이 그 미래와 희망을 실현시키시는 통로로 우리의 믿음을 사용하심을 가르친다. 우리의 매일의 일상은 곤고하고 낙심되는 일의 연속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길 위에서 선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사는 이들을 통해, 하나님은 당신의 구원을 이루신다. 룻도 보아스도 무슨 대단한 위인들이 아니며, 오히려 우리와 같은 평범한 신앙인들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런 이름 없는 신자들의 일상을 통해, 그들의 믿음의 결정과 순종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은 세상에 그 모습을 점차 드러낸다.

룻기의 마지막 장면에서 나오미는 룻과 보아스 사이에서 난 아이를 품에 안고 기뻐한다. 아이를 얻은 기쁨이 얼마나 크겠는가? 그러나 그 아이가 장차 다윗왕의 조상이요 메시아의 조상이 될 그 엄청난 미래의 현현임을 나오미도 룻도 보아스도 알지 못했다. 뉴노멀이 우리에게 어떻게 오는가 하는 것은 사실 부차적인 문제이다. 미래를 예측하고 대비하는 것보다 더욱 본질적인 일은, 오늘 우리가 당면한 상황 속에서 미래와 희망을 주시는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결정하고 순종하는 것이다. 바로 이를 통해 하나님은 당신의 구원을 이 세계 안에 실현하시기 때문이다. 그것이 미래가 오는 방식이다.

조장호교수는 센트럴신학대학원 신학분과 조교수(겸임)이고, 웨이코한인교회 담임목사로 섬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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