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팬데믹: 신학 – COVID-19 팬데믹은 종말의 징조인가?

Sam S. Bang (신학적 관점)

https://11hn.net/arc/6709

지난 3월 11일 세계보건기구 (WHO)가 팬데믹을 선언하자, 많은 사람들이 Covid-19 팬데믹이 종말의 징조라고 떠들기 시작했다. 인류의 타락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며, 마지막 회개의 기회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종종 보았다. 심각한 자연재해, 기근, 팬데믹과 같은 전염병들이 닥치면, 기독교인들은 재림의 때가 가까웠고, 종말의 대 환난이 시작된다는 생각을 쉽게 하게 된다. 물론,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오심을 기대하며 사는 이들이다. 그러나, 우리가 당하는 재난과 재앙을 너무 당연한 것으로 여겨서는 안된다. 주님께서 가져오시는 미래는 현재의 세상을 포기하고 달려가는 도피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주님의 미래는 병들고 고통가운데 있는 이 세상과 이웃들을 돌아보고, 입히고, 먹이는 자들이 상속할 나라다(마25). 우리의 종말론, 그리스도의 재림과 그 징조들, 특히 대재앙 또는 묵시적 종말론이 바르게 수정될 필요가 있다.

 

“묵시적” 종말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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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인들은 “묵시”라는 말을 들으면 대재앙을 떠올린다. 기독교인들도 대부분 가뭄과 기근, 천재지변, 핵전쟁 (아마겟돈) 등의 대재앙을 그리스도 재림의 시한부적 징조로 본다. 땅거미가 지면, 어둠이 곧 덮이듯 대재앙의 징조들과 함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것이고 세상은 멸망할 것이다. 오염된 지구를 살리고, 온난화를 막고, 쓰레기를 줄이며, 환난극복을 위해 함께 노력하는 일들도 운명처럼 다가올 대재앙앞에선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부질없는 짓이다. 그러나, 이런 묵시적, 대재앙의 종말론은 기독교적 소망과 성경의 “묵시문학”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묵시”(아포칼륍시스)란?

http://www.ecumenian.com/news/articleView.html?idxno=10010

기독교 종말론의 가장 큰 오해 중 하나는 요한 계시록 1:1절에 나오는 “묵시” Apocalypsis라는 헬라어 단어에서 비롯된다. 이 단어는 “베일을 벗기다”, “감추어진 것을 나타내다”는 의미이다. 이 단어의 의미때문에, 요한의 계시(묵시)록이 비밀스러운 장래의 일을 미리 알려 주는 책처럼 오해되어 왔다. 그러나, 묵시는 하나님께서 이미 행하신, 행하고 계신, 그리고 또 앞으로 행하실 일의 지상적 결과를 하늘의 관점으로 설명하는 것이다(그레고리 K. 비일). 그것이 묵시문학에 환상(Vision)과 천사가 자주 등장하고 상징들이 사용되는 이유다. 지상의 일과, 천상의 관점을 연결하기 위한 수단으로 말이다. 그래서, “요한 계시(묵시)록”은 미래에 일어날 연대기적 사건과 징조들을 알려주는 첵이 아니라,  지상의 고단한 현실적 삶을 천상적 관점으로 보도록 격려하고, 조명하는 하나님의 말씀인 것이다. 예루살렘 공회에서 설교하던 스데반은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서신 그리스도의 환상(Vision)을 본다(행7). 당시 교회는 예루살렘 모든 유대 유력자들로부터 박해를 받고 있었다. 스데반도 거짓 증인들에게 고소를 당한 상태다. 그 때, 하늘이 열리고 천상의 비전을 보는 것이다. 그것은 박해 아래 있는 교회의 지상적 현실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만왕의 왕으로 세상을 다스리신다는 하늘의 선포와 증거였다.

http://kr.christianitydaily.com/articles/87729/20160419/

요한계시록의 묵시도 바로 이런 예언자적 선포를 우리에게 들려주는 문학적 수단인 것이다. 주님 오실 때의 징조를 발견하고, 환난을 피하고, 재림이나 휴거를 맞이할 연대기적 날짜를 점치게 하는 수수께끼 같은 예언이 아니다. 요한계시록은 Covid-19 팬데믹을 재림의 당연한 징조로 말하고 있지 않다. 환난과 박해와 적 그리스도의 현상은 주님 오실 때까지 모든 역사를 관통 하는 지상적 현상이다. 요한의 묵시는 이런 비참 가운데서도 만주의 주로서 십자가를 지셨으나, 부활하사 하늘에 오르신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믿음과 소망 안에서 지상교회의 예배와 삶을 굳건히 지켜가라는 하나님의 위로와 격려의 말씀인 것이다.

 

천년왕국: Already and Still Coming

종말론과 관련한 가장 논쟁적인 주제는 당연히 요한계시록 20장에 나오는 천년왕국에 관한 것이다. 미국의 많은 복음주의자들이 전천년설을 주장하고, 그 중에는 세대주의적 천년 왕국설을 지지하는 이들도 많다. 그러나, 천년왕국론은 성경전체의 Narrative보다는 그리스도 재림의 징조들, 적그리스도, 대환난 등과 같은 파편적인 주제들에 집중하기 때문에 지지받는 것이다. 하나님의 역사를 풀어내는 성경의  Narrative는 하나님의 의지적 창조, 인류의 타락, 구속의 언약과 그것을 성취하시기 위해 오시는 그리스도, 그의 십자가의 죽음, 부활과 승천, 그리고 재림과 함께 성취되는 새창조이다. 그 모든 이야기의 정점에 그리스도께서 서 계신다. 성경의 종말이 무엇보다 먼저 가리키는 내용은 온 인류 역사의 가장 위대하고 결정적인 그리스도 사건들이다. 갈라디아 4:4절은 “때가 차매”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셨다고 말씀하고 있다. 다니엘서 2장은 “후일”(28절)에 세상 나라들을 무너뜨리고 영원히 진동하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질 것이라고 예언한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많은 이들은 그 약속된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눅2:29-32). 세례요한의 아버지 스가랴도,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도, 의롭고 경건한 시몬도 예수님의 탄생을 구약이 예언한 이스라엘이 위로받는 그 때(후일)의 성취로 노래하고 있다. 구약이 기다리던 그 “후일”, “여호와의 날”을 이룰 때가 차서,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이다(갈4:4). 요엘이 예언한 대로(욜2:28-32절과 행2장의 베드로의 설교를 비교) 성령의 오심도 때가 차서 오신 것이다. 사도행전2장1절-4절은 “가득찼다”(πληρόω)는 단어가 세 번 나온다. 종말은 이미 시작되었다. 승천하신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도래하는 종말은 그리스도와 함께 이미 시작된 종말의 완성이다. 요한계시록 1:6절에 나오는 “나라” (바실레이아)는 왕권을 의미한다. 이는 지상의 중생한 이들이 땅에서도 왕 노릇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계5:10은 이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하더라.” 그러므로, 계시록 20장 4절에 성도들이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하는 천년은 문자적(연대기적) 1000년이 아니라, 박해 가운데 있는 지상교회가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하는 묵시적 천년인 것이다.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의 독립을…?

http://blog.naver.com/israeltrade/221071540562

마24장, 막13장, 눅21장에서 주님께서는 예루살렘 멸망을 예언하신 후에 이렇게 말씀하신다.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28-29절) 천년왕국을 주장하는 많은 이들은 이 말씀이 1948년, 이스라엘의 독립을 가리키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비유는 “인자가 가까이 옴”을 예언하고 있는 다니엘서 7장과, 곧 이어 나오는 “이 세대가 다 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일어나리라”(막13:30)는 주님의 말씀을 근거로 해석해야 한다. 다니엘서 7장의 “인자의 오심”은 이스라엘과 메시야의 신원 (vindication)에 관한 예언이다. 구약의 예언서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 회복된 이스라엘을 모으시는 일을 예언하고 있다(렘23:3; 48:47; 49:39; 사2:2; 11:11; 미4).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회복(남은 자들을 모으심)이 AD 70년경 예루살렘의 멸망과 함께 일어날 것을“이 세대가 다 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일어 나리라” 말씀하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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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화과 나무 비유는 구체적인 대상을 가리키기 위해 주어진 예가 아니다. 그것은 자연의 당연한 이치를 설명하기 위해 주어진 예이다. 그래서, 눅21장 29절은 “무화과 나무와 모든 나무를 보라”고 말씀하고 있다. 예수님은 자연의 이치를 깨닫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예루살렘 멸망의 징조들을 보고 인자의 임함(인자의 신원, 이스라엘의 회복)을 알아차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의 비유에 나오는 무화과 나무를 1948년에 있던 이스라엘의 독립과 재림의 징조로 보는 것은 성경본문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파괴하는 것이다.

 

휴거???

천년 종말론과 대재앙의 종말론에 등장하는 단골메뉴 중에 “휴거”가 있다. 휴거 종말론은 영국의 존 넬슨 다비(John Darby, 1800, 11, 18-1882, 4, 29)의 환난 전 휴거설과, 스코필드 주석을 통해 대중화 되다가, 1996년 출판된 팀 라헤이(Tim LaHaye)와 제리 브루스 젠킨스(Jerry Bruce Jenkins)의 소설Left Behind때문에 일반인에게까지 유명해졌다. 과연 성경은 휴거를 말씀하고 있는 것일까?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하시는 내용이 마24장, 막13장, 눅19장과 21장에 나온다. 예수님께서는 마24장 40-41절에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말씀하셨다. 많은 사람들이 여기서 “데려감”을 휴거로 여긴다.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한 사람은 휴거되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한다는 것이다. 버려진 이들은 대 환난의 시간을 고스란히 견뎌야 한다.

https://wawministry.tistory.com/93

그러나, 이 본문이 예루살렘이 포위되고, 전쟁에 의해 폐허가 되는 상황을 말씀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전쟁의 상황을 생각하면,  데려감을 당하는 이들은 휴거가 아니라, 포로로 잡혀가는 것이다. 버려진 이들은 환난에 바려진 거싱 아니라, 다행히 잡혀가지 않고 남겨진 자들이다. 동일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는 누가복음 21장은 그 상황을 이렇게 묘사한다. “그들이 칼날에 죽임을 당하며 모든 이방에 사로잡혀 가겠고 예루살렘은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들에게 밟히리라”(24절). 본문은 휴거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분명하게 포로로 잡혀감을 말하고 있다. 마태복음 본문은 번역의 오류이다. 휴거를 기대하지 말라!

 

결론

그리스도인들 뿐만 아니라, 온 세상의 소망은 그리스도의 재림에 있다. 그러나, 재림의 종말론은 세상의 아픔과 고통과 질병을 대재앙과 재림의 징조로 보게 하는 종말론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재림과 종말론적 소망 안에 있는 성도들은 이 세상의 아픔을 함께 아파하는 자들이다. 세상의 죄와 고통과 사망을 해결하기 위하여 오신 그리스도, 그리스도 안에서 땅과 하늘을 흔드시고 새로운 통치를 시작하신 하나님, 세상의 탄식 가운데 친히 탄식하시는 성령 안에서 사는 자들이다. 세상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고, 함께 아파하며, 위하여 함께 기도하고, 기꺼이 다른 이들의 짐을 함께 지는 것! 예수님은 반드시 다시 오신다. 그러나, 그 날과 때에 관해서 주님은 말씀하신 적이 없다. 예루살렘 멸망을 분명하게  예언하신 예수님이지만, 날과 시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신다고 하셨다. 그러니, 징조를 말하고, 날짜를 계산하려 하지 말라! 마틴 루터는 내일 당장 종말이 오더라도,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고 고백했다. 마이클 윌킨스는 매일 매일을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살되, 주님께서 백년동안 오시지 않을 것처럼 계획을 세우라고 충고한다.  팬데믹보다 더 한 일로 세상이 끝에 이른 것처럼 보일지라도, 성도들은 우리에게 주어진 하루 하루를 백년을 위한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어야 할 것이다. Covid-19으로 병들고, 숨진 많은 사람들을 애도하며….

루터의 비문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10316024003

저자에 대해:

방삼석교수는 건국대학교에서 철학과 히브리학을 공부하고,  화란 자유 대학교에서 조직신학을 전공했다. 현재, 센트럴신학대학원 조직신학 분과장과 세인트루이스 온누리장로교회 담임목사로 섬기고 있다. 신학적 목회와 목회적 신학에 대하여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편집인 주:
이 글은 블로그 [21세기 크리스천의 관점]에서 연재기획하는 “코로나 팬데믹”의 여덟번 째 글이다. 센트럴신학대학원의 한국부 교수 방승호, 홍승민, 이연승, 김효준, 신광섭, 정신찬, 김경판 등 여러 필자들이 이 기획글에 참여할 것이다. 투고에 관심있는 독자들의 코멘트나 견해를 환영하며, spark@cbts.edu로 보내 참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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