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팬데믹: 신약 – 멈춤 그리고 침묵의 미학

SungMin Hong (신약관점)

1. “인류 역사에 이런 일이 또 있었을까?”는 물음이 자연스레 찾아오는 지금이다. 세계를 초토화시킨 전쟁들도, 전염병들도, 기근과 자연재해들도 이렇게까지 사람들을 가두었던 적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새로운 현상이다. 생존을 위해 착용하는 마스크는 시대를 아우르는 새로운 패션이 되어버렸고,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신조어가 생겼으며 많은 회의와 심지어 학교들이 온라인으로 비대면 수업을 하고 있다. 그야말로 새로운 일상 즉 “New Normal”이다. 이전에 누리던 당연한 일상은 호사였던 것이다. 그렇게 우리가 맞이하는 새로운 일상은 낯설기만 하다. COVID-19이 가져다 준 삶이다.

2. 한 페이스북 친구의 글을 읽었다. COVID는 우리에게 멈추라고, 쉬라고 한다는 말이었다. 안식하라고 외친다는 것이었다. 공감했다. 그렇다. 우리가 현재 마주한 판데믹은 그렇게 말하고 있다. 지금까지 달려온 길들을 돌아보고, 점검하고, 재고하고, 멈추라고. 쉼 없이 달려가고, 발전하고, 혁신하고, 갱신해야 하는 강박에 시달려온 산업화 아니 정보화 사회는 이제 쉼을 강요받고 있다. 전속력으로 질주하는 스포츠카 앞에 갑자기 연속적으로 나타난 “STOP” 사인들처럼 이제는 속력을 내어 달릴 수가 없게 된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4차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있지만 이마저 정지해야 하는 길목에 서게 된 것이다. 막다른 길목 (impasse)이다.

3. 교회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지칠 줄 모르고 증기를 뿜어대며 연신 달리는 기차처럼 하나님을 향한 열정이라는 구호 아래 성장을 목표로 달려가는 걸음이 멈추어졌다. 억지로 달리려고 발을 떼니 세상이 손가락질을 한다. 다들 멈추어 있는데 혼자 나가려고 하니 부작용이 찾아온다. 함께 살아야 하는 법을 본으로 보여주어야 할 교회가 함께 살지 못하는 본이 되어 망신을 당하고 있다. 미안하다는 플랜카드도, 죄송하다는 구호도 머쓱하기 그지 없는 지금인데 핍박이라며 당당하게 대면 예배를 주장하는 일들은 더욱 교회의 신뢰도를 추락시키고 있다. 멈춘 채로 돌아봐야 한다. 멈춘 채로 생각해야 한다. 멈춘 채로 주의 뜻이 무엇인지를 구해야 한다. 일단 멈추어야 한다. 그게 지금이다.

4. 요한복음 6장에서 주께서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셨다. 그 어느 누구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놀라운 이적이었다. 표적이었다.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조각으로 오천 명을 먹이시다니. 어마어마한 기적을 경험한 무리들은 이렇게 고백한다.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그 선지자, 모세가 자신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을 속량할 것이라고 예언했던 바로 그 선지자 (신 18:15). 1세기를 살아가던 고단한 민초들은 엘리야의 영광과 모세의 능력으로 찾아오는 그 사람을 보았던 것이다. 그렇게 대망하고 갈망하던 그 선지자가 광야의 조상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자신들에게 먹을 것을 주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주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떡에 열광하였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예수께서 표적을 보여주심은 “그 선지자 되심”을 알리기 위함이었지만 사람들은 도리어 “떡”에 열광했고 그 “떡”을 위하여 예수로 왕을 삼고자 하였다. 기적을 경험하여 떡을 먹은 자들은 마침내 예수를 억지로 붙들어 자신들의 임금으로 삼으려고 하였다. 바로 이 때 예수는 기적을 멈추셨다. 아니 활동 자체를 멈추셨다. 그리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셨다.”

5. 여전히 떡을 얻기 위해 예수를 찾는 이들의 모습을 보며 씁쓸하게도 우리의 모습이, 교회의 모습이 투영된다. 주께서는 한국 교회에 그리고 신학교들에 엄청난 떡을 공급해 주셨다. 배부르게 아니 그야말로 먹고 열 두 광주리도 더 남도록 부어주셨다. 수적인 부흥을, 재물을, 인력을 그리고 성장을… 문제는 이러한 가시적 양식이 가리키는 진정한 실체는 양식 자체가 아니라 본질이었다는 점이다. 떡을 통해 떡을 주신 분을 알게 하기 위함이었다. 과식의 만족함으로 실체와 본질을 망각하는 것이 아니라 만족함을 통하여 그 분을 보고 그 분의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라는 것이었다. 양식에 취해 아예 그 양식을 보낸 이를 왕으로 삼아 더 큰 만족과 배부름을 추구하려던 자들은 예수를 잃게 되었다. 주님이 떠나 버리셨기 때문이다. 주님은 홀로 계시게 되었다. 지금이 바로 그런 상황이다. 코로나 시대는 우리에게 멈춤을 통하여 떠나 버리신 주님을 다시 찾아보게 하는 기회가 된다. 하지만 반성 없이 다시 이전으로 동일하게 돌아가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심각한 위기가 될 것이다.

6. 가장 큰 위험은 주님은 멈추셨는데 그리고 떠나가셔서 우리에게 자신을 다시 돌아보라고 요구하시는데 내가 쉬지 않겠다고 덤비는 것이다. 내가 멈추지 않겠다고 그게 충성이라고 외치면서, 지금까지 잘 해왔는데 그것을 다시 하겠다는 것이다. 멈춤은 돌아봄이다. 그리고 돌아봄은 어쩌면 우리에게 참 안식을 가져다 주는 통로가 될 수 있다. 지금까지 쉬지 않고 달려왔다면 이제는 제 자리에 앉아 답답하더라도 생각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눈에 보이는 떡이 아니라 참 양식인 그리스도의 뜻이 무엇인지를 구하면서 앉아야 한다. 이미 내가 주님보다 주님의 뜻을 더 잘 아는 것처럼 함부로 일어서지 말고 하나 하나 돌아봐야 한다. 교회든 신학교든 세상과 소통한다는 구호 아래 저마다 너무나 많은 목소리들을 쉽게 내고 있다. 지금은 “교회가 미안합니다”라는 해시태그도 욕을 먹는 세상이다. 적극적인 움직임도 중요하지만 침묵 속에 묵상해야 한다. 여전히 판데믹 한 가운데 서있고 판데믹은 진행 중인데 앞서가며 쉽사리 대안을 말하고 그 이후를 말하는 것은 멈춤의 열매를 던져버리는 성급함이다. 전도서의 말씀처럼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는 것이다 (전 3:6-7)

7. 누가복음 초반부에 세례 요한의 출생 예고를 받은 사가랴는 천사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여 말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무려 거의 열 달 동안을 말하지 못하는 상태로 살아야 했다. 깊은 침묵 속에서 그는 무엇을 깨달았을까? 아내 엘리사벳이 잉태하고 배가 불러오는 것을 보며 자신의 불신앙을 자책하였을까? 후회하였을까? 어떤 마음이었든지 침묵의 시간은, 함부로 말을 내지 못하도록 만든 그 시간은 아들인 세례 요한이 탄생할 때 마침내 사가랴를 찬송으로 이끈다. 고독의 시간과 침묵은 그에게 유익이었던 것이다. 하나님을 바로 알고 그의 능력을 깊이 묵상하며 마침내 침묵이 풀릴 때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며 그 분의 영광을 체험한 그런 유익을 가져다 준 것이다.

8. 다시 요한복음으로 돌아오자. 주님은 혼자 떠나가셨지만 이내 다시 찾아오셨다. 다른 기적들을 가지고, 다른 표적들을 가지고 또 다시 사람들을 만나 주신다. 그들이 여전히 떡에만 집중하여 그것이 가리키는 진정한 실체를 보지 못하더라도 또 찾아오신다. 여기에 소망이 있다. 우리가 멈추어도 주님은 일하신다. 우리가 멈추어도 주님은 찾아 오신다. 그것이 믿음이다. “내려놓음”을 읽으면서도 무엇인가를 해야 직성이 풀리는 그리스도인들은 그리고 교회와 신학교는 깊은 멈춤과 침묵의 시간을 견뎌야 한다. 마치 엘리야가 미세한 음성을 듣고 사명을 다시 확인한 것처럼 침묵 속에 고요함 속에 주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다시 주님이 찾아와서 우리에게 손을 내미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말이다. 바로 이것이 코로나 시대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주님의 음성이 아닐까.

저자에 대해:

홍승민교수는 센트럴신학대학원 신약 분과장으로, 또한 필라델피아 근교의 브니엘 교회 설교목사로 섬기고 있다.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성경해석학 (누가복음)을 전공했으며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는 연구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편집인 주:
이 글은 블로그 [21세기 크리스천의 관점]에서 연재기획하는 “코로나 팬데믹”의 세번 째 글이다. 센트럴신학대학원의 한국부 교수 방승호, 홍승민, 이연승, 김효준, 신광섭, 정신찬, 김경판 등 여러 필자들이 이 기획글에 참여할 것이다. 투고에 관심있는 독자들의 코멘트나 견해를 환영하며, spark@cbts.edu로 보내 참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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